웃어넘기지 않는다, 에린 웡커

웃어넘기지 않는다: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보내는 쪽지
에린 웡커 지음, 송은주 옮김
펴낸곳: 신사책방
펴낸날: 2021년 8월 12일
ISBN: 979-11-975208-1-5 (03840)
제책: 반양장 128x188mm 216쪽
가격: 14,000원
분야: 에세이, 인문, 여성학

웃어넘기지 않는 여성, 일상의 페미니즘 에세이

무심하게 차별과 혐오를 저지르는 세상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웃어넘긴다면,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용감하게 흥을 깨는 사람,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 가부장제·자본주의·신자유주의·인종차별주의가 만연한 현실에서 주어지는 관습적인 행복을 단호히 거부하는 사람이 말하는 일상의 페미니즘 에세이.

“저는 지금은 여자들도 평등하다고 생각하기에 페미니스트가 아닙니다. 하지만 인종차별과 계급 불평등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데에는 관심이 있습니다.”

이 문장은 페미니즘과 문학을 강의하고 『웃어넘기지 않는다』를 쓴 페미니스트 에린 웡커가 박사과정 1학년 때 페미니즘 역사를 가르치던 교수에게 제출했던 글의 일부다. 아마도 한국의 많은 남자들뿐만 아니라 꽤 많은 여자들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에린 웡커는 아직 학생이었을 때 자신이 쓴 글을 되돌아보며 “페미니즘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은 틀렸다. 완전히 틀렸다.”라고 말한다.

“페미니즘은 성난 남성혐오자들 아니야?”라는 인식은 100년 전에도 있었다. 저자 에린 웡커는 현 사회의 가부장 문화에 대해 “사람에서든 사물에서든 남성성을 다른 존재 상태보다 본질적으로 근원적인 것으로 특권화하는 문화“라고 규정하며, 거의 모든 사회가 (페미니즘이 이룬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부장 문화 아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가부장 문화를 더 공정하고 공평하게 바꾸는 첫걸음은 페미니즘에 대한 긴급하고 절박한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아직도. 그렇다, 2000년대에 들어선 지 몇십 년이 지났어도.”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이처럼 모든 사회에서 주로 이성애자 남성들, 다시 말해 ‘제한된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행복’을 거부하고, 이런 행복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죽여야(killjoy)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 가부장 문화가 주는 그들만의 즐거움과 행복을 더는 용납하지 않고, 웃어넘기지 않는 사람들을 (페미니스트 철학자인 사라 아메드의 개념을 빌려와) ‘페미니스트 킬조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성평등 선진국이라는 캐나다도 성별 임금 격차는 100:73, 저자가 어렸을 때 100:77이었던 것보다 격차가 더 벌어졌다고 말한다. 한국의 성별 임금 격차는 202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00:67이다. 코로나19 이후로 여성의 실직이 남성보다 더 많고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이 더 높다는 것을 감안하면 상황은 더 나쁠 수 있다. 사회학자들은 어떤 변인을 고려하더라도 성별 임금 격차는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여전히 성평등은 이루어지지 않은 목표이고, 성평등을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다음 세대에서 이 격차를 줄일 수 있다. 웡커는 그 사실을 자신의 체험과, 통계와, 사회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가부장 문화를 예시로 들며 에세이를 엮어간다. 임신, 출산, 육아 중에 틈틈이 쪽지에 쓴 글을 모아서 편집해 낸 이 책은 쪽지와 쪽지를 연결해가며 우리 사회 속에 퍼져 있는 ‘강간 문화’, 여성 간의 우정을 방해하는 고정관념들, 그리고 젠더화된 몸으로 돌봄 노동을 하며 “엄마 노릇과 페미니즘이 서로 부대끼다가 마침내 공존하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자신의 신체 경험을 날카롭게 묘사하다가도 그 경험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이론을 융합하는 독특한 형태의 글쓰기를 펼쳐 보인다.

웡커는 어린 시절에 큰고모에게 다리를 벌리고 앉지 말라고 타박 받은 기억부터, 고등학생과 대학생 때 강간당할 뻔한 경험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겪은 위험한 일들, 대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일하면서 체험한 교내 사건들, 그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느낀 감정들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러면서도 그 경험들을 단순히 나열하지 않고 자신이 배운 철학, 문학비평과 이론, 대중문화에 대한 담론 안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다. 데리다, 라캉, 보부아르 같은 사상가들이 주창한 개념들도 끌어오지만, 어슐러 K. 르귄과 마거릿 애트우드, 도리스 레싱 등 여러 소설가들의 작품과 언행도 곳곳에서 언급하며 논의를 더 풍성하게 확장한다. 그렇게 웡커는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됨으로써 사회의 인식을 바꾸기 위한 기반 이론으로 페미니즘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예를 들어, 웡커는 우리가 사회에 상투적으로 던져왔던 질문을 바꾼다.

“내가 다른 식으로 질문했다면 어떨까? ‘내가 어떻게 그에게 강간하지 않도록 가르칠까? 내가 그녀에게 항상 두려워하라고 가르치지 않고 어떻게 강간을 가르칠 것인가?’라고 묻지 않고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진다면?

‘어떻게 그가 강간하도록 배우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녀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갖도록 배우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당신이 현실에서 주어지는 행복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 킬조이’라면, “무심한 행동이라도 참고 넘기지 않을 것이다. 저녁 식탁의 대화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현실 속에서 행복할 수 없는 약자와 소수자 들의 편에 설 것이다. 상투적인 질문에 답하는 대신, 세상이 던지는 질문의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함께 힘쓸 것이다.

차례

서문: 딸에게 보내는 편지

서론: 글을 읽으면서, 너를 위한 쪽지들

1장: 강간 문화에 관한 쪽지

2장: 우정에 관한 쪽지

3장: 페미니스트 엄마 노릇에 대한 쪽지

후기: 때로는 거부가 페미니즘적인 행동이다

미주

책 속에서

십 대 소녀에게 가짜 미소는 신경 틱 증상과 비슷하다. 그러다 보니 진짜로 웃을 일이 생겨도 잘 웃지 않게 되었고, 웃을 일 자체가 줄었다. 여성해방운동에서 내가 “꿈꾸는” 행동은 미소 짓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모든 여자가 당장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미소를 버리고, 자기가 즐거워할 일이 생길 때만 웃자는 것이다. (12쪽)

우리는 자본주의 속에서 살고 있다. 자본주의의 힘에서 빠져나갈 수 없어 보인다. 왕의 신성한 권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인간의 힘이라면 인간이 저항하고 바꿀 수 있다. 부당함에 저항하고 이를 바꾸려면 제일 먼저 부당함을 알아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런 부당한 힘을 언제 보게 되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21쪽)

가부장 문화를 더 공정하고 공평하게 바꾸는 첫걸음은 페미니즘에 대한 긴급하고 절박한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다, 아직도. 그렇다, 2000년대에 들어선 지 몇십 년이 지났어도. 그렇다, 북미에서도, 그렇다, 연립정부를 구성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계급을 막론하고. 그렇다, 젠더를 막론하고. 그렇다,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식으로 반복해 말하듯이. 그렇다, 반(反)인종차별주의와 연대하여. 그렇다, 정책 개혁과 협력하여. 그렇다, 자녀를 둔 사람들을 위하여. 그렇다, 자녀가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렇다, 필요하다. 그렇다. (24쪽)

페미니스트: 현대 생활의 물질적 조건이 젠더, 계급, 인종의 불평등 위에 세워져 있음을 인식하는 사람. 가부장 문화가 여성과 다른 타자들에게 본질적으로 강압적이고 숨 막힌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이런 불평등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이면서 무너뜨리려 하는 사람.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 포기하지 않는 사람. (24쪽)

우리에게 생각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론으로 페미니즘이 필요하듯이, 정부에서 정책 변화를 입안할 방법론으로도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라는 말에 여전히 많은 이가 멈칫한다. 그 말은 한물간 말이면서(페미니스트라니, 1960년대에 브래지어를 불태우던 여자들 아닌가? 답: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동시에 정치적으로 위험천만하다(좌파에 성난 남성혐오자들 아니야? 답: 그렇다, 가끔은〔하지만 어떤 조건에서 그렇게 되는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아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다). 페미니즘은 물론 복잡하지만, 부담스럽다는 이유만으로 그 말을 내던져 버린다면 그 말을 만들어 낸 역사와 투쟁까지 내팽개쳐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페미니즘 행동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이해하는 동시에, 이 그다지 새롭지 않은 밀레니엄에도 페미니즘 의식이 여전히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25쪽)

먼저 “페미니스트 킬조이”라는 말에서 시작하겠다. 페미니스트 킬조이가 되는 법에 관한 안내서를 쓸 생각이라고 말씀드렸을 때, 어머니는 걱정하셨다. 왜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니? 굳이 네가 나서지 않아도 고집 센 인간들에 대한 별칭은 충분히 있지 않니? 흠,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킬조이”라는 말은 조롱하는 것 같다. 흥을 깨는 사람,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 사람들에게 “진정해”라고 말하면 다들 더 요란하게 웃는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붙으면 “킬조이”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페미니스트”는 너무 자주 본질적으로, 문제적으로 호전적이라고 여겨진다. “페미니스트”와 “킬조이”를 한데 붙이면 서로의 관습적 이해를 교란한다. 이중 긍정? 꼭 그렇지는 않지만, 함께 쓰면 기대와 소위 상식을 효과적으로 혼란스럽게 한다.

*

페미니스트 킬조이는 즐거움으로 통하는 가부장 규범들을 어지럽히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43쪽)

행복하다는 것은 가부장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인종차별주의와 같은 지배적인 신념 체계와 동일한 견해를 밝히는 것이다. 아메드에게 행복하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기대되는 것과 “일렬로” 줄 맞춰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대의 삶 중 너무나 많은 부분이 이런 소위 행복에 거슬린다. 여자,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유색인종, 가난한 사람이라면, 다시 말해서 당신이 백인, 이성애자, 경제적으로 안정된 남성과 같은 좁은 정의에 딱 들어맞지 않는 사람이라면 당신의 경험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고 들은 것과 딱 맞지 않을 공산이 크다. 딱 맞지 않는다는 느낌은 사람을 고립시키고, 소외시키고, 힘을 잃게 만들 수 있다. 또한 행복의 지배적 개념과 맞추려는 시도는 행복해져야 한다는 명령에 따라 자극받는 시스템들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유지해 줄 수 있다. 이런 불가능한 행복의 해로운 추구는 벌랜트의 잔혹한 낙관주의 개념의 또 다른 형태다.

제한된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행복. 컨트리클럽, 리조트, 일부 소년들만을 위한 친목 단체에서 얻는 행복. 신체 모독, 인종차별, 트랜스젠더혐오, 여성혐오에서 얻는 행복. 이런 즐거움들은 죽일 필요가 있다.

*

페미니스트 킬조이로 들어가자. (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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